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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환상도 아닌, 최연우 ①


<해당 인터뷰는 작품 아랑가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연 <아랑가>는 초연과 무대, 연출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이 바뀐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랑'이라는 캐릭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초연의 경우에는 아랑으로서 도미를 사랑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많은 것들이 표현됐던 것 같아요. 행복한 모습을 주로 보여주다 보니까, 개로를 만나면서 찾아오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아랑의 행복한 인생에 갑자기 날벼락이 친 것처럼 표현이 됐죠. 연기 할 때도, ‘이걸 내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돌아올 때는, 공연계의 많은 것들이 변한 뒤였기 때문에 텍스트들도 많이 변했고, 작업해가는 과정도 많이 바뀌었죠. 작가님도 여자분이다 보니 아랑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이 많이 된다고 하시면서 란주와 저랑 얘기를 많이 하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개로, 도미, 사한 이라는 인물들이 아랑에게서 얻는 안정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그 이유가 각기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아랑이 세 남자에게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요. 개로, 도미, 사한이 아랑에게서 느끼는 감정들이 아랑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 거 같아요. 사한이에게 아랑은 엄마 같은 존재일 수 있고, 도미에게는 부인, 그리고 개로에게는 꿈속의 여인과 같은 존재인데 이들이 공통으로 아랑에게 바라는 것이 ‘안정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 캐릭터 모두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부분들이 존재하잖아요. 굉장히 강인해 보이고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도미 역시도 아랑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고, 또 그녀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거죠.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좀 더 표현을 해보려고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연 때 영상을 보면 지금이랑 아주 달라요. 지금보다 사랑스럽고, 밝았죠. 제 입으로 사랑스럽다고 얘기하려니까 오글거리지만. (웃음) 도미와 알콩달콩한 부분도 더 많았고, 여인으로서의 자태를 많이 보여줬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도미의 고민과 슬픔에 많이 공감하고 이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었다면, 지금은 다 알고 있지만, 도미가 이야기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물로 바뀐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장면이 달라졌어요. 초연 때는 아랑이 도미에게 ‘내가 이런 꿈을 꿨는데 불안하다’고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도미가 걱정을 털어놓고 아랑이 그에 대해 어떻게 하면 된다고 말을 덧붙이는 식으로 바뀌었어요. 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아랑이 되어가는 걸로 바뀐 거죠.


바로 이전 작품인 <미드나잇>의 우먼과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로 돌아오셨어요.

<아랑가> 들어갈 때 고민을 되게 많이 했어요. 두 캐릭터가 너무 상반되다 보니까 ‘관객들이 나를 다시 아랑으로 봐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우먼과 아랑이 가진 에너지의 방향성이 명백하게 달라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우먼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아요. 답답함이 느껴져서... 가끔 도림의 옷자락을 잡아채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혼자 ‘여긴 백제야…’ 라는 생각을 자꾸 하면서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어요. (웃음) 움직임의 속도에 차이도 더 주고 있어요. 우먼은 좀 더 날렵하고, 계획적이고, 무언가 손 쓸 틈 없이 해내는 여자였기 때문에 아랑은 템포나 움직임에 있어서 차이를 좀 더 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발끝이나 손끝의 움직임 처리까지 춤선이 돋보이는데, 안무 연습 과정과 특히 신경 쓰고 있는 포인트가 있다면?

초연 때는 모든 배우가 부채를 썼어요. 부채가 있을 때는 제 손이 부채만큼 길이가 늘어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부채가 없으니까 손끝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그래서 제 손으로 그때처럼 안무의 마무리를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또, 의상이 한복이라서 옷에 맞는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도 있구요. 어떤 캐릭터를 만났을 때, 캐릭터의 자세, 서 있는 모습에 대해서 매번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도미, 개로 역의 배우에 따라 느낌이 다 제각각일 것 같아요.

전부 다 달라요. 필석 오빠의 개로는 뿜어내는 에너지가 상당히 커요. 모든 개로들이 에너지를 풀 파워로 쓰고 있긴 하지만, 필석 배우는 그걸 하나하나 즈려밟는 스타일에 가까워요. 그래서 감정의 밀도가 깊어지게 되죠. 그럼 저도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그 깊이에 맞춰서 에너지를 쓰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공연이 진행될수록 배가 많이 고파져요. (웃음) ‘어찌 울지 않을 수 있는가’ 부터는 허기를 많이 느껴요. 유덕 오빠의 개로는 필석 오빠보다 좀 더 빨라요. 오빠가 잡은 캐릭터 자체가 속도가 상당히 유동적이거든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이죠. 그래서 그것을 빠르게 캐치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속도감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배우예요. 한근 오빠의 개로는 한없이 연약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요. 다른 두 개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고 소중해서, 왕이 아닌 한 남자에 대한 부분들이 더 잘 보이는 개로인 것 같아요. 세 명의 개로 모두 불안정한 왕들이지만 그 불안정함이 전부 다른 느낌이에요. 필석 오빠는 히스테릭하고 날카롭게 미친 왕이라면, 유덕 오빠는 벗어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게 느껴지지만 ‘난 그래도 왕이야’라고 말할 것 같은 당당함이 느껴지는 왕이고, 한근 오빠는 그와 반대로 ‘난 왕인데…’라며 울 것 같은, 하염없이 여리게 느껴지는 왕이에요.

도미에 대해서 말하자면, 도미를 맡은 두 배우가 평소에 굉장히 밝아요. 지철이도 재영 오빠도 밝은 성격의 소유자죠. 초연 때는 도미를 맡았던 율 오빠도 그렇고 상호 오빠도 그렇고 둘 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어요. 되게 조용했거든요. 상호 오빠가 상대적으로 위트가 있는 편이고 말을 잘하긴 하지만, 이번 도미들에 비하면 조용했던 거구나 싶어요. 둘 다 ‘우리가요 Part 1’에서 끊임없이 어떤 애드립을 할지에 대한 회의를 미친 듯이 해요. (웃음) 아, 저들의 목적은 이 장면에서 아랑을 웃기는 거구나 싶을정도로. 재영 오빠는 사뭇 진지한 도미를 연기하는데, 저는 오빠를 잘 아니까 그게 너무 웃겨요. (웃음) 물론 키도 크고, 의상도 잘 어울리죠. 재영 오빠의 도미가 좀 더 올곧은 충신이라면 지철이의 도미는 그보단 아랑을 조금 더 생각하는 게 느껴져요. 재영 오빠는 백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80%, 아랑을 사랑하는 마음이 20%라면 지철이는 백제가 70%, 아랑이 30%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요 Part 2’가 이 마음이 아랑에게 100%로 향하게 되는 지점이 되는 거구요. 초연 때는 백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50%, 아랑을 사랑하는 마음이 50%로 반반이었는데 지금은 좀 더 충신에 비중을 많이 둔 것 같아요.


아랑가의 공연이나 연습실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아, 검무 때문에... (웃음) 두 명의 도미 모두 몸을 잘 쓰는 분들은 아니에요. 사실 도구가 하나 생기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도미들이 맨날 칼로 벽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벽에 있는 조명이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면 둘 다 ‘천장이 낮아서 그래~’ 라는 말로 넘어갔죠. 한 번은 공연하다가 칼이 휜 적도 있어요. 공연 중간에 안으로 들어와보니까 재영 오빠가 칼을 열심히 펴고 있는 거예요. 뭐하냐고 물어봤더니 ‘칼이 휘었어... 이따가 개로가 칼을 꺼내야 하는데 어떡해…’ 하면서 계속 칼을 펴고 있더라구요. (웃음) 으이구.


가장 좋아하는 아랑가 넘버는?

‘백제의 태양’을 제일 좋아해요. 이 곡은 뮤지컬 음악과 판소리가 명확하게 잘 어우러진 넘버라고 생각해요. 고구려 도적 떼들이 몰려오는 상황에 대한 묘사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고 그 소리가 정말 좋더라구요. 너무 좋아서 다 외웠어요. 다른 배우들도 그 넘버만 나오면 안쪽에서 그걸 다 따라부르고 있어요. 그래서 매번 들을 때마다 ‘소리가 가진 매력이 이런 거구나’ 하고 감탄하게 되죠. 중간에 아이가 엄마를 부르면서 우는 부분이 있는데, 연습 때 저를 비롯한 다른 배우들도 이 장면을 보면서 다들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초연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백제의 태양’이 제일 좋아요. 보통 공연을 하다 보면 좋아하는 넘버가 바뀌기도 하는데 저는 이 넘버가 넘사벽인 것 같아요.


개로에게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할 때, 정말로 미련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개로에게서 벗어날 시간을 벌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일단 가자고 하니까 왕을 붙잡으려고 급하게 하는 말이긴 해요. 그렇지만 아랑에게는 어느 쪽이든 별로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아요. 내 존재 자체의 의미가 없어졌으니까요. 왕을 보내고 난 뒤, ‘왕을 따라가든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겠는가’라는 생각을 하죠. 주저앉아서 기도하다 보니까 ‘내가 죽는 것 또한 상관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심청이와 같은 심정으로 ‘나 하나 죽어서 이 사람이 살 수만 있다면 내가 사라지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을 수 있는 선택이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사실 저는 어떤 작품이든 공연을 하면서 시시각각으로 생각이 계속해서 바뀌는 걸 좋아해요. 어떤 확고한 생각의 흐름보다는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선택을 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이 길을 가게 되기를 원해요. 저는 공연 내내 몇 초 단위로 바뀌는 캐릭터의 서브 텍스트들을 하나하나 전부 다 채우는 게 재밌거든요. 그래서 개로에게 말을 꺼낼 때도, 사실은 매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상대 배역에 따라서도 달라지죠. 어떤 왕은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끌고 갈 것 같기 때문에 붙잡아야 해서 급하게 말을 꺼내는 거고, 어떤 왕은 아랑처럼 기진맥진한 상태로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이야기 할 때는 저 또한 비슷한 심정으로 말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마지막에 강에서 도미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실제로 도미와 재회한 건지 아니면 도미의 환상을 보며 그리움과 회한을 표현하는 건가요.

중립적인 것 같아요. 대본상 그것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정해두지는 않았어요. 물론 도미가 죽은 게 맞긴 하죠. 그런데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은 서로 교차하는 순간이거든요. 서로 스쳐 지나가고, 눈이 멀었던 도미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죽은 것을 알게 되면서 이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 그때, ‘그래, 함께 가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더더욱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덧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지금 이 사람과 함께 있다면, 동이 트는 마을에 가서 해 뜨는 걸 보고, 바람 불고 꽃 피는 곳에 함께 갈 수 있다면, 죽었다는 사실은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인 것 같아요. 사한이의 죽음을 알게 되는 장면도 굉장히 비슷하게 표현이 돼요. 반복적인 표현이죠. 사한이를 직접 마주하고 있고, 만나긴 했지만 이것이 실제로 만난 것인지 아니면 후에 이야기만 듣게 된 것인지는 정해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사한마다 표현이 다르기도 하고, 아랑이 그것을 받아주는 것이 그때그때 다르기도 하니까요.



최연우가 추천하는 <아랑가>의 관람 포인트.

사실 이야기는 단순해요. 설화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모티브만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가는 게 아닌 이상은 뻔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어요. 다이나믹한 스토리를 기대하기는 힘들죠. 저희도 초연을 만들어갈 때, 이 단순한 이야기를 어떻게 파고들지 고민이 참 많았어요. 텍스트를 분석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회의를 하면서 이 스토리를 파헤치려고 했죠. 그런데 어르신들이 이 공연을 보시고 나서 ‘모두가 안타깝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긴 생을 살았는데, 산 것 같지가 않구나’라는 대사를 통해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하시는 걸 듣게 됐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이분들은 이 공연을 깊게 파고들려고 하기보다는 어떤 하나의 도형처럼 <아랑가>라는 큰 그림 자체를 봐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관객에 따라 공연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아랑가>에 임하는 마음이 달라졌죠. 하나하나 캐묻기 시작하면 이 공연은 흘러갈 수 없는 것 같아요. 저희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만들어 가려고 했지만, 그랬더니 공연이 매끄럽게 흘러가지 못 하더라구요.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까 공연의 스타일이 생겼어요. <아랑가>는 돌직구를 날리는 공연에 가까워요. 공 한 개가 날아가는데, 변화구도 아니고 직구로 날아가는 거죠. 이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고, 거기에 확 꽂히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텍스트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맡기는 게 저희 공연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만일 초연을 보셨던 분이라면, 초연의 아랑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초연과 재연을 비교하는 재미도 찾아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극 속의 질문처럼 ‘사랑이 무엇인가?’

전적으로 제 생각이지만 사랑은 부질없는 것. 그런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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